건축연대 |
1191년 완공 |
건축왕 |
자야바르만 7세 (1181~1220) |
종교 |
불교 |
건축양식 |
바이욘 |
위치 |
동 바라이 위쪽 |
예상 관광시간 |
1시간 이상 |
출사 정보 |
각 방향으로 찍을 것들이 다 많기 때문에 어느때 가던지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일반출입구인 서쪽으로 입장해서 동쪽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늦은 오후라면 더 좋겠다.
특히 유해교반과 서쪽탑문을 동시에 담으려면 오전엔 역광이 된다.
구조가 복잡하고 길 잃기 쉬우므로 지도 지참 필수 |
자야바르만 7세 때인 1191년에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불교사원으로 어머니를 위해 지은 따 쁘롬과 기본 설계나 구조가 거의 동일하며 56.7ha에 이르는 광대한 사원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 톰을 짓기전까지 자야바르만 7세가 잠시동안 왕궁으로 사용했다.
이사원은 3중의 주벽(700*700m)을 환호가 감싸고 있으며 도로에서 서쪽문까지 150m 거리에 링가를 모방한 석주기둥 96기가 서있으며 석주가 끝나는 지점에 신과 아수라들이 바수키 뱀을 잡고 우유바다를 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서쪽 탑문 페이지 참조)
또한 사원 북쪽 끝에는 그리스식 둥근 기둥으로 지은 2층 건물이 있는데 고행승과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죽은 후에 힌두교도등에 의해 파괴되었다.
1939년 이 사원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나가라 자야슈리(Nagarajayacri)라는 태국어가 등장하는데 그 뜻은 성스러운 칼을 뜻한다.
이때문에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성검은 태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크메르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가 왕조를 연 뒤 후계자인 왕자에게 국가의 위기를 지켜주는 신검을 물려주었고 자야바르만 7세가 챰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 신검을 이 사원에 모셔왔다고 한다
또한 이 사원에는 97,840명의 승려, 일꾼, 천명이 넘는 압사라가 있었으며 700*800의 주벽 바깥에는 0.9*3.7 km의 환호와 6.5ha의 넓은 공간에 10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갔을때 여기 첨부된 Preah Khan 지도가 있었으면 좀 더 자세히 많은 것을 보았을텐데
대충 다니느라 다 보지도 못했고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중엔 길을 잃은게 아닌가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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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출입문은 왕이 다니던 동문가 그외 남문이었는데
복원과정에서 서문을 복원하고 길을 내면서 지금 관광객들은 서문을 통해서 입장하게 되어 있다.
차량(툭툭)에서 내려서 한적한 숲길로 들어가야 하며
중간에 현지 아이들이 놀고 있을 수 있는데 귀엽다고 사진 찍는다면 $1 ^^
도로에서 서쪽문까지 150m 거리에 링가를 모방한 석주기둥 96기가 서있는데
아래 사진은 24개정도만 나온것이고 나머지를 다 찍으려면 100여m 더 뒤로 가야한다.
만약 96개 모두 포함해서 찍는다면 서쪽 탑문이 너무 작게 나올 것이다.
사다리라도 있으면 탑문 바로앞 유해교반도 좀 더 나오지 않을까싶다.
Focal Length (35mm 기준) : 82 mm (123mm)
위 사진의 석주가 끝나는 다리부분에 신과 아수라들이 양쪽에서 바수키 뱀을 잡고 우유바다를 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조금 더 뒤에서 찍었어야 하는데 바수키 머리가 좀 짤렸다.
Focal Length (35mm 기준) : 18 mm (27mm)
역시나 침략의 흔적인지 거의 다 머리가 잘려져 나가 있다.
서쪽 탑문의 가루다
Preah Khan은 훼손의 정도가 심했다고 하는데 서쪽 탑문은 복원이 꽤 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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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많이 찍은것 같은데 신전군에 대한 사진이 별로 없다.
변명을 하자면 상세 지도가 없었고 주위는 복원이 다 안되어 있었던가?
그래서 바로 앞에 보이는 중앙 사원으로 바로 들어갔었을 것이다.
중앙사원은 불교 건축물이긴 한데 자야바르만 7세 이후 다시 힌두교 숭배 시대가 도래한 후에는 이들 힌두교 사원들이 쁘레아 칸에서 중심 신전으로 중요시 되었고 신전의 많은 부분이 힌두교 이미지로 전환되거나 추가되었다.
서쪽 탑문에서 들어오자 마자 비쉬누 신전군이 있고, 북쪽(왼쪽)은 쉬바 신전이 남쪽(오른쪽)에는 부왕의 사당이 있다.
이것이 비쉬누 신전군 입구인지? 중앙 성소 입구인지?
위 건물의 벽면에 있는 압사라 부조
그리고 입구에 경비원이 있는데 가이드 역활?도 하는 듯하다.
가이드 역할이 맘에 든다면 팁은 필수
말만 잘 알아들었어도 좋은 사진 더 찍었을텐데 아쉽다.
신전인지 중앙사원인지 역시 헛갈린다.
준비 많이 해간다고 갔는데 이렇게 광대하고 많은 의미가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신전 내부는 십자형인것 같고 내부는 꽤 어두운 편이다.
F4.5, 1/10 sec, ISO 200, VR on, 밝기 보정
서쪽 탑문등은 복원이 잘 된 편이지만 여기저기 무너져 있고 복원이 안된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아래 사진들은 중앙 사원과 무희들의 홀을 지나 동쪽으로 나갔을때 찍었던 사진들이다.
이때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기에 어느게 어떤 신전인지 알 수가 없다.
Preah Khan은 길 잃기 정말 좋은 곳이다. ㅡㅡ;
완전히 길을 잃었다.
대충 방향이 이쪽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가는데 밑의 사진과 같이 담벼락만 있다.
다행이 제대로 찾아가긴 했지만 찍어야 할 사진을 많이 못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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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성소는 벽돌 위에 목재 프레임을 넣고 그 위에 청동으로 돋새김을 하는 등 인테리어에 무척 세심한 배려를 하였고 자야바르만 7세의 아버지를 보살로 형상화한 상이 놓여있었는데 16세기에 스투파(탑)으로 교체되었다.
중앙성소의 특징은, 원 건축자인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도여서 처음에는 불교 성소로 건립되었으나 후대에 다시 힌두교로 바뀌면서 힌두교 성소들이 자리를 함께하게 되어 부처와 함께 쉬바 등의 힌두 신들이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중앙성소에서 동쪽은 통로문, 서쪽 방은 비쉬누 신에게 바쳐진 사당이며 북쪽은 쉬바신에게, 남쪽은 자야바르만 7세의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당인데 아직 정글에 묻힌 채 남아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면이 중앙 성소를 향해 약간 높혀져 있다는 점.
내부의 방 배치도가 마치 일반 힌두 사원의 성소처럼(사방에 각각 탑 하나씩, 그리고 중앙에 성소탑이 놓인) 메루산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중앙 성소의 stupa
아래 사진의 한가운데 검게 보이는 것이 위 사진의 중앙 사원의 stupa이다.
아래 사진은 렌즈 때문에 원근감 때문이 아니라
중앙으로 갈 수록 문의 크기가 낮고 작아져 신앞에 다가갈 수록 머리를 숙이게끔 되어 있다.
아래 사진의 위 부조-중앙 사원을 에워싼 2 겹의 내벽에는 수많은 부처상이 벽감 형태로 새겨져 쁘레아칸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위 사진의 아래쪽 부조-무희들의 홀의 춤추는 압사라이다.
무희들의 홀/광장 : 동쪽 탑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광장 잔해가 맞이한다.
4개의 드넓은 직사각형 공간(소광장)을 끼고 난 광장에서 기둥으로 떠받혀진 회랑 형태의 건물 잔해가 성소쪽으로 인도하는데 이 방은 무희들의 홀이라 불린다.
물론 잔해의 상인방, 벽면 등에 새겨진 압사라(춤추는 천녀들) 부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궁중 연회가 개최되거나 사원에 제사를 드리거나 봉헌식을 할때 무희들이 이곳에서 춤을 추어 분위기를 돋우고 축하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압사라들이 그려진 이 홀의 대형 상인방(문틀위)은 공사 실수로 무너졌다.
이 홀에서부터 사원 내부로 통로가 연결되니 홀의 용도는 사원의 화려함을 더해주는 거대한 장식물이기도 했다
무희들의 홀에서 나가 북쪽(왼쪽)으로 나가면 신성한 검이 있었을것이라는 2층 건물이 있다는데 길 잃어버려서 못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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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 Prohm 보다는 덜하지만 여기도 나무들에 의해 사원들이 버티고 있다.
나무 윗부분을 잘라내지만 뿌리부분까지 제거하면 무너질 건물도 있을것이다.
몇백년을 밀림에 묻혀있었으니 세월과 자연의 힘이라 생각한다.
건물 안쪽에서 난 창을 통해 찍은 사진을 액자 모양으로 cut한 사진인데 앞의 두기둥이 가려서 좀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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