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eang과 Prasat Suor Prat는 코끼리 테라스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나 패키지의 경우는 있는지 조차 모를 수 있고 자유여행자의 경우도 일부러는 찾아보지 않는 유적지일 것이다.
뜨거운 테라스에서 고생하고 끌리앙이 있는 숲에 가서 정말 잘 찾지 않는 Vihear Prampil Loveng 도 한번 둘러보고 그외에도 숨어 있는 조그마한 유적지도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봐도 좋을거이다.
그리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 부러울 것이 없다.
North Kleang에서의 휴식
출사 정보 Kleang과 Prasat Suor Prat 전경을 찍으려면 오전의 역광을 피하도록 한다. Prasat Suor Prat 만 찍을때는 넓은 잔디밭 위에 덩그러니 하나씩 12개가 솟아 있으므로 시간대에 따라 동/서 방향에서 찍으면 된다.
Khleang 내부 밑 뒷편의 이름 모를 사원들의 잔재들은 숲속에 있으므로 시간대에 크게 영향은 받지 않으나 광량은 조금 부족하여 조리개를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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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연대 |
12세기 후반 |
건축왕 |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2~1220) |
종교 |
불교 |
건축양식 |
바이욘 |
위치 |
코끼리/문둥왕 테라스 맞은편, 끌리앙 사이의 평지에 길게 나열 |
예상 관광시간 |
20분 |
쁘라삿이란 크메르 어로 "탑"이란 뜻으로 승리의 문으로 가는 길을 사이에 두고 각각 35m거리를 두고 6개씩 총 12개의 탑이 숲을 배경으로 일렬로 서 멋진 사진의 배경이 되어 준다.
용도
앙코르 유적 중에서도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이는 이 탑들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①원래는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탑들을 연결하여 밧줄을 묶어 그위에서 줄타기도 하고 거대한 차양을 쳐서 연회석을 만들고 국왕은 왕궁 앞의 테라스에 앉아 이광경을 구경했다고 한다.
이름도 '밧줄 타는 탑(Tower or Cord Dancer)'이다.
②그리고 왕실의 장례의식에도 사용된 듯하다는 주장
③크메르 제국의 각 지방 영주들이나 식민지 국가에서 조공 또는 진상품을 바치러 올 때 물건을 쌓고 검사하는 곳이라고도 하며
④앙코르 유적을 발견한 프랑스의 앙리 무오는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옛날, 이곳을 직접 탐방하고 남겨진 방문기가 가장 신빙성 있지 않겠는가?
원나라 사신으로 크메르 왕국을 찾았던 주달관(Zhou Daguan)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재판정으로 소(訴)가 제기되거나 죄를 심판할 때 원고와 피고를 각각의 탑에 감금하고 결과에 이의 제기를 방지하기 위해 친척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며칠을 지내게 한 뒤 이들이 탑에서 나왔을 때 만약 아픈 기색을 보이면 유죄라고 한다.
이러한 식별법은 하늘의 심판이라 여겼다고 하니 체력 달리는 사람은 꼼짝없이 죄인이 되는 재밋는 재판이었던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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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Prasat Suor Pra
North Prasat Suor P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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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연대 |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 |
건축왕 |
북쪽 끌리앙 : 신축 : 라젠드라바르만(Rajendravarman II, 944∼968년)
개축 : 자야바르만 5세(Jayavarman V, 968∼1001년
남쪽 끌리앙 :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 1002∼1049년) |
종교 |
힌두교 |
건축양식 |
끌리앙 |
위치 |
코끼리 테라스 맞은편 |
예상 관광시간 |
30분 |
끌리앙이란 "창고"라는 뜻이며 위치적으로 코끼리 테라스의 남쪽 계단과 북쪽 계단을 마주보며 대칭하여 건립된 건물이다.
북쪽 끌리앙을 보면, 이름대로라면 이 건물은 창고여야 마땅하지만 창고라고 보기에는 건물이 지나치게 아름답고 품위 있다.
앙코르와트 사원 내 갤러리에서 우리는 크메르 왕에 대한 신하들과 외국사신들의 충성맹세의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중요한 곳에 새겨지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의 장면이 바로 이 건물에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흔치 않은 이 부조가 새겨졌을 이유를 유추해보건데 아마도 이 건물은 귀족이나 외국 대사들이 앙코르의 왕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갖고 있다.
그러한 유추를 뒷받침하는 것이 연대적인 증축시점이다.
북쪽 끌리앙은 원래 라젠드라바르만 왕 (Rajendravarman II, 944∼968년) 시절 목조건물로 지어졌으나 그 아들 대인 쟈야바르만 5세 시절 충성 맹세 부조와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정성을 잔뜩 들인 현재의 석조 건물로 개축되었다.
자야바르만 5세는 크메르 건축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예술적 최고 경지에 이끈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란 역사적 지평을 짚어 볼 때 건물의 변신과 함께 용도도 변경하지 않았을까 한다.
연대적으로는 북쪽 끌리앙이 먼저 건립되었고 남쪽 끌리앙은 후대인 수르야바르만 1세 시절에 건립되었으나 건물 및 인테리어 모두 미완성인 상태로 이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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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leang 정면
South Kleang 내부
South Kleang 뒷면
North Kleang 정면
North Kleang 뒷면
North Kleang 내부
North Kleang 뒷쪽 잔재
North Kleang 뒷쪽 잔재
North Kleang 뒷쪽 잔재
옛날옛적 건물들은 지붕을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
여러 방식이 있지만 아래 방식은
돌들을 무게중심을 잘 맞추어 조금씩 가운데로 모이게 한층한층 쌓아 올린 방식으로 보인다. 천정 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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